디폴트값이 있는 삶
독서 챌린지에서 김경일 교수의 책을 읽다가 “결정하는 데 생각보다 많은 에너지가 든다”는 대목에서 한참 머물렀다. 이번 주 나를 깎은 것과 채워 준 것이 모두 이 한 문장 위에 있었다.
Chapter A
막막함이 나를 깎았다
한눈에 보기 · 나는 이런 게 피곤하다
- 정보 없는 요청 (“견적 주세요” 한 줄) 필요한 항목을 묻는 답장 템플릿으로 되묻기
- 감정을 그대로 쏟아내는 사람 그 사람의 감정 처리 방식일 뿐, 내 일에 대한 평가가 아니다
- 원치 않게 비위를 맞춰야 하는 순간 ‘맞춰 주기’가 아니라 ‘상대에 맞는 브리핑 고르기’
- 돌발 상황, 방향 없는 자율 “내가 원하는 방향” 한 줄부터 정하기
나를 지치게 하는 건 일의 양이 아니라 막막함이다.
여행 일은 하나만 어긋나도 누군가 낯선 도시에 막막하게 남겨진다. 그래서 다들 날이 서 있고, 피크 시즌을 앞둔 요즘은 더 그렇다.
인원도 날짜도 없이 “견적 주세요” 한 줄만 온 메일. 정리해 보낸 정보는 읽지도 않고 돌아온 “이렇게 정해진 게 없으면 어떡하냐”는 볼멘소리. 여유가 있을 땐 되물으면 그만인데, 쌓이면 짜증이 났다. 웃으며 맞춰 주고 나면 어김없이 현타가 왔다.
돌아보니 나를 깎은 건 일의 양이 아니라 방향이었다. 방법을 아는 일은 많아도 덜 지쳤고, 방향 없는 자율과 예측할 수 없는 상대 앞에서 훨씬 지쳤다.
이걸 설명하는 개념이 심리적 엔트로피(Hirsh, Mar, Peterson, 2012)다. ‘다음에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는 불확실함’이 사람을 지치게 한다는 것. 정보 없는 견적 메일은 엔트로피 덩어리였던 셈이다. 그렇게 보니 볼멘소리를 하던 그 사람도 막막함을 견디기 힘들었을지 모른다. 그렇다고 덜 짜증 나진 않지만, 조금은 덜 얄밉다.
‘결정 피로’는 Baumeister의 자아 고갈 이론(1998)에서 시작됐다. 의지력은 쓰면 줄어드는 연료라는 주장이다. 재현 연구에서 효과가 작게 나오면서 ‘연료가 아니라 이제 쉬자는 뇌의 신호’라는 해석도 나왔지만, 나는 연료 쪽이 더 와닿는다. 크게 지쳐 본 사람은 안다. 무엇을 걸어도 몸이 꿈쩍하지 않는 시기가 있다는 걸.
Chapter B
디폴트값이 나를 채웠다
한눈에 보기 · 나는 이런 걸로 회복한다
- 좋은 재료로 지은 깨끗한 음식, 특히 샤브샤브 지친 날엔 고민 말고 냄비부터
- 단골 순댓국 (주 3회) 맛있으면 같은 걸 먹어도 괜찮다
- 까만 넉넉한 티 + 청바지 아침의 “뭐 입지?” 없애기
- 나한테 잘 입힌 날, 거울 속의 나 기분 전환용 ‘예쁜 세트’ 하나 정해 두기
- 하루의 리듬을 알려 주는 Steady “지금 뭐 하지?” 대신 일상
디폴트값이 있으면 막막한 순간 자체가 줄어든다.
돌아보니 나는 이미 본능적으로 디폴트값을 만들며 버티고 있었다.
밥
이번 주 인덕션을 처음 써 봤다. 계란 토마토 볶음을 해 먹고, 남은 샤브샤브에 고기를 더 넣어 다시 끓였다. 좋은 재료로 깨끗하게 먹는 게 좋아서, 전골 냄비를 하나 사서 매일 샤브를 해 먹을까 싶을 정도였다.
나는 맛만 있으면 같은 걸 계속 먹어도 괜찮은 사람이다. 지금은 같은 집 순댓국을 주 세 번 먹고, 홍대 근처에 살 땐 샤브샤브를 주 다섯 번 먹었다. “오늘 뭐 먹지?”가 없다는 게 생각보다 큰 휴식이었다.
옷
까만 넉넉한 티에 청바지나 반바지 몇 벌을 돌려 입는다. 스티브 잡스를 따라 하려던 건 아닌데, 아침에 “뭐 입지?”가 사라지니 확실히 덜 지친다.
그래도 가끔은 예쁘게 입고 싶은 날이 있어서, 그런 날을 위한 세트도 하나 정해 두려 한다. 좋아하는 옷을 나한테 잘 입혀 줬을 때, 거울 속의 기분 좋음. 디폴트값이 있어야 이런 기분을 챙길 여유도 생긴다.
하루
나는 근무 시간이 정해지지 않은 일을 한다. 하루 전체가 방향 없는 자율이다. 그래서 하루 루틴을 실시간으로 보여 주는 앱 Steady를 직접 만들어 쓴다. “지금 뭐 하지?” 대신 “지금은 밥 먹는 시간이구나”를 알려 준다. 내게 필요했던 건 할 일 목록이 아니라 일상이었다.
Closing
고민하지 않음으로써 여유를 챙긴다.
앞으로 고민과 결정을 최소화하는 환경을 만들어 보자.
그런데 아직 디폴트값이 없는 시간이 하나 있다. 쉬는 시간이다. “쉬는 시간이니까” 하고 누우면 결국 쇼츠를 보게 된다. 어떻게 채울지 모르니, 지친 뇌가 가장 쉬운 길로 가는 것이다.
쉬는 시간을 진짜 회복으로 채워 줄 디폴트값은 무엇일까. 다음 주에는 그 시간을 채워 보려 한다.